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 (문단 편집) == 루쿨루스의 정원 == 루쿨루스의 이름을 후세까지 남기게 한 또 다른 작품은 그가 지은 고급 별장 '루쿨루스의 정원(호르티 루쿨라니)'다. 건설 당시 로마 가장자리의 피니키우스 언덕에 자리잡고 있었고, 그 일부는 이곳이 자리잡은 스페인 계단 근처에서 볼 수 있다. 건설자이자 소유자인 루쿨루스가 별장에 딸린 정원을 단순한 놀이터, 유흥장을 넘어 당대 최고의 럭셔리 끝판왕으로 만들기 위해, 본인이 주최한 연회의 상징으로 활용해 공개 직후부터 지중해 세계의 '세계수도' 로마에서도 가장 영향력 있고 사치스러운 장소의 끝판왕이 됐다. 루쿨루스는 젊은 시절, 로마인에게 아시아로 불린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직접 본 페르시아, 헬레니즘 풍의 원예, 정원 스타일을 그대로 루쿨루스의 정원에 접목시켰다. 하여 증개축을 거쳐 더 호화로워진 서기 55년 당시에 설치된 모자이크의 경우에는, 동로마 제국과 중세 서양 모자이크의 대표방법인 황금 세공 타일과 유리 타일 등이 발견돼, 로마 시대 금, 유리 세공기술이 중세 동로마-서양 금, 유리 세공기술로 가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폼페이우스]]는, 루쿨루스를 "로마의 [[크세르크세스]]"라고 반농담, 반조롱식으로 부르면서, 루쿨루스의 정원이 페르시아풍의 이국적인 모습과 로마 특유의 멋이 두루 갖춘 것을 평했다. 그는 정원을 가꾸고, 자신의 예술품들을 그 정원에 장식했는데, 탐미주의자이면서도 미적 감각이 대단해 그 호화로움과 예술적 완벽함은 제정 시대까지도 찾기 어려웠다고 한다. 더욱이 프린키파투스(원수정) 시대 재테크의 달인으로 유명한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가 매입 후 개보수하고 그 가치를 키워, 그 명성은 더 높아졌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 1세]] 황제의 아우구스타로, 탐욕스럽기로 유명한 [[메살리나]]는 이 정원을 갖고 있던 원로원 의원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가 반역죄로 자살한 뒤, 압류를 금지한 결정에도 유가족들에게서 이 정원을 강탈해 손에 넣고 이곳에 빠져 지냈다. 메살리나는 이 정원을 아시아티쿠스 유가족들에게서 빼앗은 뒤, 매일 같이 살면서 이곳을 자신의 호화 놀이터이자 불륜장소로 사용했다. 그래서 이 정원은 당대에 음탕함의 악명까지 얻게 됐는데, 서기 48년 메살리나가 중혼 후 궁중쿠데타를 시도하다가 실패 후, 황제의 명령으로 살해돼 사치와 난잡함, 인생 무상 등의 다양한 이미지까지 얻게 됐다. 메살리나가 살해된 이후에도 여러 번 소유자가 바꼈는데, 16세기까지도 소유자가 있음이 기록으로 확인된다. 16세기에 루쿨루스의 정원을 가진 사람은 로마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딸 펠리체 델라 로베레인데, 이후 루쿨루스의 정원 일부인 빌라 보르게세는 포도원으로 있다가 다시 거대 정원으로 탈바꿈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